안규철 개인전 《12명의 안규철》
Ahn Kyuchul Solo Exhibition – Ahn Kyuchul Multiplied
<전시서문>
안규철 설명?서
안규철은 누구인가? 안규철(安奎哲, Ahn Kyuchul)은 1955년 출생, 유년기를 춘천에서 보내다 국민학교 시절 상경하여 보성중고교를 졸업,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73학번으로 입학, 졸업 후 1980년 『공간』 기자직을 잠시 거쳐 약 7년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85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하였고 1987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유학, 이듬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후 주제페 스파뉼로(Giuseppe Spagnulo)에게 사사, 1992년도 유학 중 샘터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5년 귀국 이후에는 1997년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창립 멤버로 참가하여 2021까지 미술원 교수, 미술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라는 설명이 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소위 연대기적 서술이 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그를 상술한다기보단 그저 안규철이란 인물에 대한 건조한 색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정체’를 규명하라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물의 지난 행위들로부터 그를 추론 해보려 할 수도 있을 텐데, 예컨대 직업적 분류의 차원에서 그의 행보를 되짚어 보자면 그를 기자, 저술가, 번역가, 교육자, 작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중에서도 약 40여년 간 시각예술의 자장 내에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고려했을 때, 그에겐 ‘작가 안규철’이라는 호명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 안규철’은 누구인가? 어떤 작가인가? 기실 ‘작가 안규철’에 대한 혹은 안규철-작업에 대한 설명을 모두 모은다면 ‘안규철 매뉴얼’이라든가 ‘안규철 사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두꺼운 책 하나가 족히 나올 정도로, 그 답변은 차고 넘친다. 방대한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일상 사물을 사용”하되 사물의 “기표의 가장 드러나는 의미를 감추지 않은 채 의미의 그물망에서 다른 의미들을 건져내(1)”는 작가로, “단순한 형체 제거의 추상으로서가 아닌 개념적 언어로서의 초월을 가능케 한” “‘사물들의 통역가’로 불리’(2)“울 수 있는 작가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종종 ‘개념주의 작가’로 분류되며, “조형으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관념적 아이디어의 유희”에 그치는 일종의 언어적 농담의 생산자처럼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상의 이미지 자체보다는 언어에 의존한다고 해도 좋을, “시각적 금욕주의”자인 안규철은 동시에, 일상적 사물의 외형을 재현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수공적 작업 방식을 고수할 만큼 조형 행위에 큰 의미를 두고 있(3)” 는 ‘조각가’이기도 하다. 작업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의 작업에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 객관적 시각 세계도, 정치적 현실도, 초월적 세계도 아닌, 또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미술’이라는 명제”라 설명되어 있다. 반면 그러면서도 그의 ‘메타 미술’은, “단일 논리의 허구를 노출시키고 그것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점에서 정치적 제스처(4)”이기도 하다. 결국 ‘작가 안규철’ 또는 안규철이라는 (이름표를 단) 작업-작가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형상이고, 미술이면서 동시에 정치다. 언뜻 모순된, 서로 어긋나는 것들의 종합이 결국 안규철-작업-작가인 셈인데, 이를 비약적으로 말하면 ‘작가 안규철’은 모든 ‘작가’이며 동시에 어떠한 ‘작가’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안규철과 안규철들
“그 대신에 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교훈과 설교보다 질문이 내 작업의 목표라면, 그 작업의 성패는 그 질문들이 관객에게 회피할 수 없는 절실한 질문이 되느냐, 그렇지 않고 하나 마나 한 질문이 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안규철, 『안규철의 질문들』
“돌이켜보면 이리저리 기울고 되돌아오고 상처받으면서도 어느 쪽에서도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우유부단한 탓인지 모든 것을 향해 항상 열려 있기를 바랐다. 이제 나는 내 속에 여러 명의 내가 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각자의 나들을 살아 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안규철, 「나의 작가적 전개 과정에 대해」
이러한 모순, ‘작가 안규철’이 안규철이면서 동시에 안규철 아닌 모든 ‘작가’가 되는 까닭은, 안규철 스스로가 “작가란 ‘질문하는 사람’”으로 규명하듯 ‘작가 안규철’이란 질문자, 아니 어쩌면 모든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 안규철’이란 질문의 특이성은 그가 첫 개인전에서 도발하듯 선언했고 약 30년이 지나서도 고수한 것처럼, ‘작가 안규철’이 “외람”될지라도 자꾸만 “잡아보라”며 “달아(5)”나는 질문, 즉 답을 희구하거나 스스로 답이 됨으로써 종결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데 있다. 답으로부터 우회함으로써 답 아닌 것들의 차이를, 혹은 답의 윤곽만을 어렴풋이 드러내려는 반복되는 시도. 혹은 질문을 가장한, 답이 예상되는 질문으로 오히려 그 뻔한 답을 도출시키는 제조건을 상기시키는 반문이 ‘작가 안규철’이란 질문이다.”
그러나 반문의 모순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한한 되물음의 꼬리물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는다. 덕분에 반문은 특정한 질문의 대상과 조건을 넘어선 연속적 사유를 던져줄 ‘수 도’ 있다. 다만 반문의 가능성이 ‘태’에 지나지 않는 것은, 결국 반문은 그 태생적 모순으로 인해 질문이나 대답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것처럼 언뜻 보이기 때문이다. 안규철의 질문 역시 단편적으로는 지독한 회의에 젖은 평서문, 혹은 주장도 반론도 아닌 그저 질문을 위한 질문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반문은 연속적인 질답의 충돌 속에서야 그것의 가능태를 성질로 발현시킬 수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안규철은 ‘작가 안규철’의 지난 40여년 간의 질문 끝에도 “아직 하지 않은 질문이 없는지” 수없이 되돌아본다. 또 하나의 물음표를 찍고 마치는 것을 마치 “작가적 한계를 스스로 받아들(5)”이는 섣부른 종결로 여긴다. 결국 안규철에게 있어 ‘작가 안규철’은 앞서 세운 논리를 부정하거나 우회하거나 뒤엎고 보충하는 상이한 반문들로 끝없이 연쇄해 등장(해야만)한다. 덕분에 ‘작가 안규철’은 “여러 개의 동시다발적이고 서로 상충하는 (…)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작가(6)”로 분화된다.
정체하지 않는 ‘작가 안규철’의 정체성들은, 여기 아마도예술공간의 서로 엇비슷하게 다른 12개 공간을 임시 거처로 삼아 제각기 다른 형과 태의 작품으로 그 목소리를 드러낸다. 신뢰하나 무한히 의심하는, 진지하나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는, 제자리를 맴도나 방향성을 띤, 무엇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넌지시 가리키는 거짓 마침(7)의 부조리한 음성들. 그러나 불협화음도 연속되며 공명하는 하나의 곡을 만들어 내듯, 각기 다른 안규철들은 서로에게 묻고 또 응하며 또 하나의 물음으로 공진한다. 작가 안규철이란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해야 할 작가인가라는 재귀적 질문들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듯 증폭되어 전달된 의문문들. 그 수신항에, 수신항에, 당신은 서있다. 모든 반문이 전제하는 뻔한 답처럼 극히 일상적인 외형들 앞에서, 또 답변을 원하는 것인지 그저 선문답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리송한 문장들 앞에서 당신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놓인 물음표들은 그 의구심을 당신의 내면과 그 바깥으로 되돌릴 것을 종용한다. 당연한 것처럼 놓인 이 세상 모든 온점들의 심부를 향해, 새삼스런 되물음의 갈고리를 드리울 것을.
[각주]
(1) 김해주, 「안부를 전하는 편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워크룸프레스, 2014), 37
(2) 이건수, 「언어 같은 사물, 사물 같은 언어」, 위의 책, 301
(3) 안소연, 「삶의 부재를 사유하는 공간」, 위의 책, 309
(4) 윤난지, 「바깥의 ‘흔적’을 담은 메타 미술」, 위의 책, 435-442
(5) 안규철, 「그림, 요리, 사냥」(1992) / 안규철, 「나의 작가적 전개 과정에 대해」(2004)
(6) 안규철, 『안규철의 질문들』(워크룸프레스, 2024), 82
(7) 거짓 종지, 위장 종지(Deceptive Cadence). 화성학적으로 곡의 한 구조 또는 곡 자체의 긴장이 해결•종결될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에 전형적인 종결 화성 대신 나타나는 진행. 거짓 마침 화성은 종결을 대리하여 기대감을 무너뜨리고 연결, 전조 등을 통해 곡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글. 곽노원 아마도예술공간 디렉터
<작품소개>
1. 세계에 대응하는 개인
〈걷는 사람〉은 작가가 최초로 시도한 애니메이션 작업이다. 12분 56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은 걷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일곱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인물이 배경의 빠른 이동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거나, 무리에서 이탈하려 시도하다가 실패하거나, 주변에 있던 사물들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을 가로막는 무리들에 떠밀려가고, 바닥에 쓰러지고, 바닥에 있던 익숙한 사물들이 지상을 떠나고 하늘을 날던 새들이 땅에 떨어지는 동안에도 인물은 개의치 않고 계속 앞을 향해 걷는다. 시대와 불화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개인의 모습은 파트릭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프란츠 카프카의 우화 [돌연한 출발]의 주인공들을 연상케 한다.
2. 수행적 퍼포먼스
작가는 2010년대 이후 단순하고 명료한 행위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퍼포먼스 작업을 발표해왔다. 나무로 분장하여 식물의 시간을 흉내 내고, 자전거에 푸른 하늘을 그린 캔버스를 싣고 도로를 주행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사다리에 올라앉아 세종로의 축선에 어긋나는 방향을 바라보는 등 작업 노트에 기록된 생각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쓰러지는 의자 – Homage to Pina〉 역시 실패와 좌절을 모티프로 한 수행적 퍼포먼스 영상이다. 인물은 계속 쓰러져 있기를 원하는 의자를 한사코 일으켜 세우려 하고, 의자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인물에 끝끝내 저항하면서 하나의 극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마지막에 의자는 아예 인물까지 넘어뜨리며 쓰러진다. 둘 사이에는 타협도 절충도 없다. 쓰러지거나 일어서 있거나.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고, 넘어지기의 대가인 바스 얀 아더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3. 추상에 대하여
작가가 최근에 발표하고 있는 평면 작업은 회화에 관한 회화, 미니멀리즘 회화에 관한 메타 회화라 할 수 있다. 2025년부터 2124년까지 하나의 점과 하나의 연도가 대응하는 〈점 연습 – 100년〉, 하나의 점과 한 글자가 마주하는 〈점 연습 – 그대는 아는가 – 파울 첼란〉은 기하학적 추상의 건조함과 삶의 구체성이라는 대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시도한다. 〈검은 사각형〉 연작은 객관적 세계를 지시하지 않고 순수 형태를 지향했던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을 인용한다. 작가는 검은색 물감들(아이보리 블랙, 마스 블랙)을 이용해 미세한 색조의 차이를 드러내고, 붓질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말레비치가 선언했던 ‘회화의 영점’으로부터 최소한의 형태, 절제된 조형의 부활을 시도하며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선 연습 – 오른손〉, 〈선 연습 – 왼손〉은 서예와 회화의 기본인 선긋기를 정해진 원칙에 따라 수행함으로써 선을 긋는 몸의 움직임을 화면에 소환한다. 각각 오른손과 왼손을 사용한 이 작업은 기하학적 엄격성과 불완전한 몸 사이의 중간지대를 탐색한다. 빨강, 노랑, 파랑, 흰색을 섞어 회색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열한 〈11월의 날씨〉 또한 구체적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제거한다.
4. 반어의 어법
글쓰기를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말해온 작가는 자신의 글을 포함해 기존의 시, 소설, 잠언 등으로부터 가져온 텍스트를 작업 소재로 사용해왔다. 이번 전시의 텍스트 작업은 기표와 기의가 어긋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修身齊家(수신제가)〉는 마지막 글자가 따로 분리된 상태로 씌어지고, 화려한 금박으로 씌어진 〈無爲自然(무위자연)〉은 문장이 담고 있는 도덕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역행하는 작위(作爲)적 상태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나열한 〈세상에 있는 것들〉, 부도덕한 내용으로 채워진 〈좌우명〉,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시력검사 – 새〉는 세태에 대한 씁쓸한 블랙코미디이다.
5. 협업자로서의 자연
〈눈을 기억하는 세 가지 방법〉은 2013년에 구상했던 ‘겨울 작업’ 중 하나로 ‘날씨’를 작업의 협업자로 초대한 작업이다. 작가는 날씨를 미술작업의 훼방꾼이 아니라 동반자로 받아들인다면,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이율배반을 범하는 것은 적어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시장 옥외에 놓이는 이 작업은 눈덩이를 뭉쳐놓은 형태를 재현한 조각이 놓인 좌대, 눈이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조각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작가가 사과문을 써 붙인 좌대, 앞으로 올 눈을 기다리며 마음의 눈으로 눈을 생각해보라는 안내문을 써 붙인 좌대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좌대는 작가가 거쳐왔던 작가적 태도-리얼리스트, 미니멀리스트, 개념주의자-를 반영한다. 지하 전시장 창문에 뚫은 작은 구멍을 통해 햇빛이 실내의 벽과 바닥을 지나간 경로를 기록한 〈햇빛의 경로 – 12월〉은 작은 방 안의 사소한 현상으로부터 우주를 사유하고 순간에서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방안에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햇빛을 보며 소일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6. 공회전
촬영용 전동 턴테이블을 개조해서 확장한 키네틱 작품 〈두 개의 의자〉는 회전하는 하나의 원판 위에서 각각 회전하는 두 개의 의자를 보여준다. 얼핏 의인화된 두 의자가 춤을 추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으나, 둘은 서로 어떤 교감도 없이 각자의 회전을 반복한다. 두 의자는 같은 판 위에 얹혀있으나 자신의 회전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의자는 회전하는 원판 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자신의 주변을 볼 수 있기에 어떤 공격에도 미리 대처할 수 있다며 지금의 상태에 만족해한다.
7. 작품(예술가)과미술 제도
작가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한 질문, 또 예술가의 길이란 무엇인가 등 예술의 장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규범을 정의하는 작업을 진행해 온 바 있다. 〈두 개의 돌〉, 〈두 개의 공〉도 이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조각과 글이 하나의 쌍을 이룬 〈두 개의 돌〉은 작품(예술가)이 처한 두 가지 상황을 보여준다. 바닥에 놓여있는 돌은 아직 선택받지 못한 자신이 특별하다고 주장하며 미술관 진입을 열망하지만, 미술관이 요구하는 조건들에 낙담한다. 반면 진열장 안에 들어있는 가짜 돌은 미술관 바깥의,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진짜 배구공과 가짜 배구공을 나란히 둔 〈두 개의 공〉 역시 원본과 복제,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넘나든다.
8. 사물의 불화
사물을 임의의 규칙에 따라 해체하고, 재배열하는 것. 분해, 분쇄, 절단, 분류 등의 과정을 통해 사물의 원래 기능, 본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90년대 이후 작가가 해온 오브제 조각의 중요한 방법이다. 〈변신 연작 – 서랍장〉은 살림살이를 보관하던 가구로서의 기능이 제거되고, 관조와 사유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랍장 뼈대(집)의 부분들은 직사각형의 추상적 부조로 결합하는데 작가는 가능한 분해한 부분들을 자르거나 부수지 않고 미리 정해둔 윤곽 안에 배열한다. 각재들은 나뭇결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배열되어 목수의 손길과 시간의 흔적을 담은 부조가 되었다. 뼈대(집)를 잃은 서랍은 공중에 매달린 채 그 자체의 오랜 시간의 질감과 무게를 드러내며 새로운 존재감을 얻는다. 〈변신 연작 – 카프카〉 역시 책을 절단하거나 한 줌의 재로 되돌린 작업이다. 재가 되어 휘발된 문장과 단어들은 원래 있던 일상의 언어로 불가역적으로 되돌아가며, 잘려진 책들은 여러 권의 불완전한 책으로 변신한다. 이 작업들에는 나치의 분서, 독재 정권의 검열 등 다른 생각을 지우고 다르게 조합하는 언어를 금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저변에 자리한다. 한 대의 자전거를 반으로 절단한 〈자전거와 온실〉은 원래의 기능이 제거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은 채 새로운 장소에 기거하는 무용한 사물의 운명을 보여준다.
9. 기억하는 빛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2014년 개인전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 ‘Only others save us’라는 문장을 구슬로 꿰어 매달았던 이 작품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상처 받은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의 말이었다. 이번 작업은 크리스탈과 원석을 꿰어서 같은 문장이 드러나도록 짜맞추어 매달아 전시장의 맨 마지막 방에 설치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공간을 구분하는 문이자 공간에 띄워놓은 환영의 말로 상정하여, 안과 바깥, 나와 타인,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벽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 벽은 쉽게 젖혀지고 흐트러질 수 있지만, 언제나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기호이자 경계의 역할을 하는 완강한 벽이기도 하다. 전시의 마지막 작업 〈honesty〉는 작은 라이트 박스에 새긴 ‘honesty’를 통해, 올해로 작고 20주기를 맞는 박이소 작가를 기억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4년 그가 작고하기까지 가까운 동료로서 친분을 맺었던 작가는 박이소가 빌리 조엘(Billy Joel)의 노래 ‘honesty’의 가사를 정직하게 번역해 열창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12명의 안규철’ 전시에 초대한다.